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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후백제 견훤

먼 옛날 기록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광주 북촌에 자태가 고운 딸을 둔 부자가 있었는데, 딸이 말하기를 밤마다 자색 옷을 입은 남자가 찾아와 함께 밤을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그 남자의 옷자락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두라 일렀고, 다음 날 그 실을 따라가 보니 담장 아래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습니다. 그 후 딸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 아이가 자라 스스로 견훤이라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견훤이 갓난아기였을 때, 부모가 밭일을 나가며 아이를 숲 아래 두었는데, 어디선가 호랑이가 나타나 젖을 물려 주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아이가 예사롭지 않다며 오래도록 그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장성한 견훤은 체구가 크고 기운이 남달라 군에 들어가 이름을 알렸습니다. 창을 베고 잠을 자며 늘 앞장서서 싸웠기에, 그 공으로 젊은 나이에 비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가 살던 시절, 신라는 이미 기울고 있었습니다. 왕은 총애하는 무리에 둘러싸여 국정을 돌보지 않았고, 흉년까지 겹쳐 백성들은 떠돌았습니다. 굶주린 이들이 곳곳에서 도적이 되어 일어나던 그때, 견훤도 무리를 모아 서남쪽 고을들을 하나둘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한 달 사이에 오천 명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마침내 완산주에 이르러 좌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백제가 세워진 지 육백여 년, 그 나라가 신라와 당나라 군사에 무너진 원한을, 내가 이제 갚지 않겠는가."

그렇게 후백제가 세워졌습니다.

이후 견훤의 삶은 전쟁과 동맹, 그리고 배신이 끝없이 얽히는 세월이었습니다. 신라의 왕도까지 쳐들어가 왕과 왕비를 욕보이고 새 왕을 세울 만큼 그 기세가 등등했지만, 북쪽에서는 또 다른 세력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로 고려를 세운 왕건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십 년을 겨루었습니다. 때로는 인질을 주고받으며 화친을 맺었다가도, 인질이 갑자기 죽는 사건이 벌어지면 곧바로 서로를 의심하며 다시 칼을 겨누기를 반복했습니다. 견훤은 한 번은 왕건에게 긴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활을 평양 누각에 걸고 말에게 패강의 물을 먹이겠다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왕건 역시 지지 않고 답장을 보내, 그간 견훤이 저지른 참혹한 일들을 조목조목 짚으며 경계를 늦추지 말라 맞받았습니다. 이 편지들은 당대의 문장가 최치원이 대신 지은 것으로 전해질 만큼, 두 세력의 신경전은 문장 하나까지도 팽팽했습니다.

전장에서도 승패는 엎치락뒤치락했습니다. 견훤이 크게 이겨 왕건의 장수들을 여럿 잃게 한 해도 있었고, 반대로 견훤의 군사 삼천여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어 이북의 여러 성이 스스로 항복해 오는 해도 있었습니다. 견훤 밑에 있던 뛰어난 신하 공직이 마침내 견디다 못해 왕건에게 투항하는 일이 벌어지자, 분노한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을 붙잡아 불로 다리 근육을 지져 끊어버리는 잔혹한 벌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쌓일수록, 견훤을 따르던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견훤의 말년을 무너뜨린 것은 결국 적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로워 견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견훤이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맏아들 신검을 비롯한 형제들은 불안에 떨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은밀히 손을 잡고, 아버지를 금산의 절에 가두고 금강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날 견훤이 잠에서 덜 깬 채 궁궐 뜰에서 들려오는 함성을 듣고 무슨 소리냐 물으니, 곁에 있던 이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왕께서 연로하시어 정사에 어두우시니, 맏아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 것을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그때 세간에는 이런 노래가 떠돌았다고 전해집니다.

"가련한 완산 아이, 아버지를 잃고 눈물이 술처럼 흐르네."

석 달 가까이 갇혀 지내던 견훤은 자신을 지키던 병사 서른 명에게 몰래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든 뒤, 배를 타고 탈출했습니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평생의 적이었던 고려, 왕건의 곁이었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아들들을 치기 위해, 견훤은 오랜 원수에게 몸을 맡기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왕건은 그런 견훤을 극진히 예우하며 '상보'라는 존호를 올리고 넓은 식읍과 노비, 말을 내려 주었습니다.

한편, 견훤의 사위였던 장군 영규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조용히 속을 털어놓았습니다. 평생을 바쳐 이룬 대왕의 공업이 하루아침에 집안싸움으로 무너졌으니, 이제 역적이 된 아들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 역시 그 뜻에 동의했고, 두 사람은 은밀히 왕건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응할 뜻을 전했습니다.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훗날 영규의 아내를 누님처럼 예우하겠노라 약속했습니다.

마침내 왕건은 대군을 일으켜 후백제를 정벌하러 나섰습니다. 견훤도 그 대열에 함께 섰습니다. 자신이 세운 나라, 자신이 낳은 아들의 군대와 마주하는 자리였습니다. 전장에서 갑자기 구름이 칼과 창의 모양을 이루며 고려군 쪽으로 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그날의 기세는 고려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습니다. 후백제의 장수들은 하나둘 갑옷을 벗고 항복해 왔고, 신검도 결국 두 동생과 함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왕건은 항복한 이들을 대부분 살려 주었으나, 처음 반역을 꾸민 신하 능환만은 죄를 물어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견훤은 그 모든 결말을 두 눈으로 지켜본 뒤, 끝내 터져 나온 울분으로 등에 종기가 나서 황산의 한 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일흔, 나라를 세운 지 마흔다섯 해 만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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