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돌아가기

혀끝에 맴도는 낯설고도 그리운 맛. 한참을 생각하던 재희는 그것이 석류의 맛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무지개를 본 듯 뛰놀았습니다. 어린 시절 방 안에 둘러쳐 있던 병풍 속 석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익은 송이는 방긋 벌어져 붉은 알을 내비쳤고, 그 곁에는 늘 어머니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약그릇을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재희는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열이 오르고, 옛 생각이 자꾸만 밀려왔습니다. 지금은 어머니도, 병풍도, 석류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운 향기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머리맡에 놓인 책을 뒤적이던 재희는 우연히 한 소설가의 이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

준보.

...

어릴 적 같은 학교에 다니던 그 아이였습니다. 소설 속에 그려진 이야기마저 그들의 어린 시절과 꼭 닮아 있었습니다.

재희는 반에서 늘 수석을 다투던 아이였고, 준보는 눈빛이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두 사람이 특별히 가까웠던 것은 아니지만, 재희는 사람들 사이에서 준보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해지곤 했습니다. 새 옷을 입은 날이면 누구보다 먼저 그에게 보이고 싶었고, 선생님께 칭찬을 받으면 그 사실이 준보의 귀에 들어가길 은근히 바랐습니다.

봄이 되어 학교에서 산으로 나들이를 갔던 어느 날, 준보는 위험한 바위 끝까지 기어가 진달래꽃을 꺾어 왔습니다. 재희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손을 내밀었지만, 준보는 퉁명스럽게 괜찮다며 뿌리쳤습니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몸이 앞으로 쏠렸고, 재희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그의 발을 붙잡았습니다. 다행히 준보는 떨어지지 않았지만, 팔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나 때문에 다쳤구나."
"너 때문에 너 주려고 꽃 꺾은 줄 아니."

그 고집스러운 대답에, 재희는 서운하면서도 웃음이 났습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준보는 병으로 앓다가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서울로 떠나 버렸습니다. 재희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렇게 소설가가 된 그의 이름을 통해서였습니다.

재희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 서울로 올라갔던 기억,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자란 시간들. 학교를 마친 뒤에는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결국 아버지를 위해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는 은행원이었지만, 결혼은 글자 그대로 무덤이었습니다. 남편은 방탕한 생활 끝에 은행의 돈에까지 손을 대고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재희는 결국 다시 예전에 다니던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재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아이들의 모습에 겹쳐 보곤 했습니다.

반에는 갑남이라는 고집 센 아이와, 애순이라는 다정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갑남이는 가난하여 점심을 굶는 날이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날이면 애순이도 함께 점심을 굶었습니다. 하루는 재희가 몰래 애순이의 책상 속을 살펴보았더니, 그 안에는 분명 점심이 들어 있었습니다. 갑남이가 먹지 않는 날에는, 애순이도 자신의 점심을 두고 일부러 굶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유를 묻자 애순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갑남이가 안 먹으면 먹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은 재희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불 속에서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순수한 마음을 마주한 것이 오랜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로 재희는 두 아이를 더욱 아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졌습니다.

준보의 이름을 책에서 발견한 오늘, 재희는 다시 열이 올라 자리에 누웠습니다.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어지러운 지도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창밖으로 저물어가는 짧은 햇살이 노랗게 비쳐 들었고, 베개는 이미 눈물로 축축이 젖어 있었습니다.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