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 삼백년 - 하편 (각색)
동인사담집
임진년, 왜적이 조선을 침략하며 온 나라가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이 국난의 순간, 조정은 다시 정철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는 늙은 몸을 이끌고 명나라를 오가며, 의용군을 모으며 나랏일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갑오년, 정철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철이 사라지자, 동인 측의 움직임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던 최영경의 명예를 회복시키자는 상소가 잇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명예 회복에는 숨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최영경을 훌륭한 인물로 추켜세우면, 자연히 그를 죽인 사람은 나쁜 인물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정철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정철이 겉으로는 최영경을 구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주장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5월부터 11월까지, 정부는 이 문제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결국 그해 겨울, 이미 세상을 떠난 정철의 관직이 깎이고 말았습니다.
한편,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죄를 받은 정개청이라는 전라도 선비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는 절의를 배척하는 글을 썼다는 죄목과, 정여립에게 지나치게 아첨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갔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정개청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이후 조선 조정의 당파 싸움에서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동인 계열이 정권을 잡으면 그를 추앙하며 서원을 세웠고, 서인 계열이 정권을 잡으면 그 서원을 즉시 헐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흐름에 따라 정철의 벼슬도 오르내리기를 반복했습니다.
선조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도, 정개청의 명예를 회복시키자는 상소는 계속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삼 년을 치르기 전에는 의논하지 못한다"며 이를 미뤘지만, 삼 년이 지나자 다시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인조 임금 때에 이르러,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정철의 아들들이 상소를 올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인조 임금은 이를 받아들여 정철의 관직을 돌려주었고, 이듬해에는 정개청의 관직도 함께 복원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건이 시작된 지 칠십 년이 지난 효종 임금 때, 다시 한번 정개청의 서원을 헐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실제로 헐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숙종 임금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치판이 뒤집힐 때마다 정개청의 서원이 세워졌다 헐리고, 다시 세워졌다 다시 헐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때마다 정철의 벼슬도 함께 오르내렸습니다.
이런 다툼은 숙종 임금의 시대를 지나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다만 숙종 이후로는 정권이 한쪽으로 오래 기울어 있었기에, 반대편에 섰던 이들은 상소문을 써 놓고도 올릴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흥선대원군이 등장하여 나라 전체의 서원을 모두 철폐하였습니다. 이로써 정개청의 서원도, 정철을 둘러싼 다툼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서원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졌으니, 세우고 헐 대상도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선조 임금 시절의 작은 사건 하나가 그 뒤로 무려 삼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여러 임금과 여러 정권을 거치며 계속 되풀이되었던 것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정철은, 이 오랜 다툼을 지켜보며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Hippuf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