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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 삼백년 - 상편 (각색)

동인사담집

조선이 세워진 지 오래지 않아, 고려 말엽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한 성리학은 퇴계 이황 같은 큰 학자들을 통해 조정의 중심 학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선조 임금은 이황을 깊이 신임하였는데, 이황이 늙어 벼슬을 내려놓으려 할 때 임금이 물었습니다. "경이 물러가면 앞으로 나랏일을 누구와 의논하리오?" 이황은 서슴없이 이준경이라는 신하를 추천하였습니다.

당시 조정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명문가의 후손이나 왕족 출신으로 추천을 받아 벼슬에 오른 사람들과, 과거 시험을 거쳐 벼슬에 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준경은 문과 급제 출신이었지만, 어느 쪽 출신이든 상관없이 재주 있는 사람을 고루 등용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스스로를 특별한 부류라 여기던 선비들 사이에서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훗날 큰 학자로 이름을 남긴 율곡 이이조차도 이준경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준경은 세상을 떠나기 전, 임금께 마지막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 안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을 보니 무리를 지어 서로 배척하고 큰소리만 즐기니, 이 풍습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이는 이 말을 두고 이준경이 선비들을 미워하여 임금이 선비들을 믿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라며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준경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붕당의 싹은 이미 조정 안에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앞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관리가 우연히 재상의 집에 들렀다가, 그 집에 머물던 젊은 선비 김효원의 이부자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재주 있고 장래가 촉망되던 김효원이 재상가에 문객으로 머문다는 사실에, 이 관리는 내심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훗날 김효원이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치고, 후배 선비들을 잘 이끌어 존경을 받게 되었을 때도, 이 관리는 예전 일을 들어 그를 소인이라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습니다. 젊은 선비들은 이에 반발했고, 알고 보니 김효원이 그 집에 머문 것은 문객이 아니라 친척 관계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그 관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이렇게 나이 든 세대와 젊은 세대가 서로를 헐뜯으며 갈라섰습니다. 두 사람의 집이 각각 서울의 동쪽과 서쪽에 있었기에, 이때부터 이들은 동인과 서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율곡 이이였습니다. 그는 본래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불교에 몸담았다가 다시 유학으로 돌아와 성리학의 대가로 성장한 인물이었습니다. 임금은 그를 깊이 신임하여, 이이와 자주 학문적 언쟁을 벌이면서도 결코 그를 곁에서 떠나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이는 처음에는 당파 싸움을 중재하려 애썼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서인 쪽에 가까워졌습니다. 젊은 선비들의 행동이 너무 과격해지고,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동인 측이 서인으로 지목된 이들을 잇달아 탄핵했기 때문입니다. 이이는 이 무의미한 다툼을 없애보려 애썼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 선조 임금 기축년에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전주에 살던 정여립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이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재주 있는 사람이었는데, 훗날 이이를 등지고 동인 쪽으로 옮겨갔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제자들을 모아 "어느 임금이든 정성껏 섬기면 충신이 될 수 있다"는 위험한 학설을 강론하였습니다.

기축년 시월, 정여립의 반역 사건이 발각되었습니다. 그는 아들과 부하 두 명과 함께 산속으로 도망쳤다가 관군에게 포위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잡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조정의 요직에 있던 동인 재상들도 그와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책임, 즉 위관의 자리에는 서인이었던 정철이 앉게 되었습니다. 정철은 성품이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사건에서 오히려 반대편인 동인의 신하들을 구하려 여러 차례 애썼다는 사실입니다.

우의정 정언신이 정여립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을 때, 정철은 임금 앞에서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우리 조정 이백 년 동안 아직 한 번도 대신을 죽인 일이 없습니다." 이 말에 임금은 사형 명령을 거두고 귀양으로 감형하였습니다.

최영경이라는 인물이 옥에 갇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병이 깊어지자 정철은 의원을 여러 차례 보내 병을 돌보게 했습니다. 그러나 최영경은 끝내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책임 문제는, 훗날 오랜 세월 동안 계속 논란이 되는 씨앗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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