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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roy: 현진건

피아노
현진건 (1922년, 개벽 발표)

궐은 가정의 단란에 흠씬 심신을 잠기게 되었다. 보기만 하여도 지긋지긋한 형식상의 아내가, 궐이 일본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불의에 죽고 말았다. 궐은 중등 교육을 마친 어여쁜 처녀와 신식 결혼을 하였다.

새 아내는 비스듬히 기른 머리와, 가벼이 옮기는 구두 신은 발만으로도 궐에게 만족을 주고 남았다. 게다가 그 날씬날씬한 허리와, 언제든지 생글생글 웃는 듯한 눈매를 바라볼 때에, 궐은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살아서 산 보람이 있었다.

부모의 덕택으로 궐은 날 때부터 수만 원 재산의 소유자였다. 수년 전 부친이 별세하시자, 무서운 친권의 압박과 구속을 벗어난 궐은, 이제 맏형으로부터 제 몫을 타게도 되었다.

새 아내의 따뜻한 사랑을 알뜰살뜰히 누리기 위하여, 번거롭고 방해 많은 고향을 떠난 궐은, 바람 끝에 꽃 날리는 늦은 봄에, 서울에서 신살림을 차리기로 되었다.

우선 스무남은 칸 되는 집을 장만한 그들은, 오랜 동경대로, 포부대로 이상적인 가정을 꾸미기에 노력하였다. 마루에는 마호가니 테이블을 놓고, 그 주위를 소파로 둘러 응접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안방은 침실, 건넌방은 서재, 아랫방은 식당으로 정하였다.

놋그릇은 위생에 해롭다 하여 사기그릇과 유리그릇만 사용하기로 하고, 세간도 조선식 옷걸이나 삼층장 같은 것은 거창스럽다 하여 전부 없애버렸다.

누구든지 그 집에 들어서면 첫눈에 띄는 것은, 마루 정면 벽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거울 박힌 양복장과, 그 양편 화류나무로 만든 소박한 탁자에 아기자기 놓인 사기그릇, 유리그릇이었다.

식구라야 단둘뿐인데, 찬모와 침모를 두고 보니 아내가 할 일도 없었다. 남편으로 말하여도, 먹을 것이 넉넉한 다음에야 인재를 몰라주는 이 사회에서 굳이 작은 이익을 다툴 필요도 없었다.

독서, 정담, 화원 가꾸기,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들의 일과였다.

이외에 그들의 일과가 있다면, 이상적 가정에 필요한 물품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이상적인 아내는 놀랄 만한 예리한 관찰과 치밀한 주의로, 이상적 가정에 꼭 있어야 할 물건들을 찾아내었다. 트럼프 카드나 손톱 깎는 집게 같은 것도 그 중요한 발견 중 하나였다.

하루는 아내가, 그야말로 이상적 가정에 없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째서 이제야 그 생각이 났는지, 스스로 놀랄 만한 무엇이었다. 홀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거듭 지으며, 마침 어디 나가고 없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에, 제삼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아내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회오리바람같이 달려들었다.

"나 오늘 또 하나 생각했어요."

"무엇을?"

"그야말로 이상적 가정에 없지 못할 물건이야요!"

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또 무엇을 가지고 그러오?"

"알아맞혀 보셔요."

아내의 눈에는 자랑스러운 빛이 역력하였다.

"무엇일까……."

남편은 먼 산을 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세간을 둘러보기도 하며 진지하게 한참을 생각하더니, 겸연쩍은 듯이,

"생각이 아니 나는걸……"

하고, 무안한 얼굴로 또 한번 웃었다.

"그것을 못 알아맞히셔요?"

아내는 톡 쏘듯 한 마디를 던졌다. 한참 남편의 얼굴을 생글생글 웃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슨 중대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려는 사람처럼 입술을 남편의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피아노!"

"옳지! 피아노!"

남편은 큰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소리를 버럭 질렀다. 피아노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줄지, 상상만 하여도 즐거웠다. 어렴풋하게 뜬 남편의 눈에는, 벌써 피아노 건반 위로 나비처럼 오가는 아내의 하얀 손이 어른어른하였다.

그 후 두 시간이 못 되어, 훌륭한 피아노 한 채가 그 집 마루에 여왕처럼 놓였다. 아내와 남편은 이 화려한 악기를 바라보며, 기쁨이 넘치는 눈웃음을 주고받았다.

"마루에 무슨 상서로운 기운이 뻗친 듯한걸."

"참 그래, 온 집안이 갑자기 환해진 듯한걸."

"그것 보시오, 내 생각이 어떤가."

"과연 주도면밀한걸. 그야말로 이상적인 아내 노릇 할 자격이 있는걸."

"하하하……"

말끝은 웃음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한번 쳐 볼 것 아니오. 이상적인 아내의 음악 솜씨를 좀 봅시다그려."

하고 남편은 행복에 빛나는 얼굴로 아내를 향하였다.

아내의 밝던 얼굴은 갑자기 흐려지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 물들인 것처럼 새빨개졌다.

아내는 애써 그런 기색을 감추려 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먼저 한번 쳐보셔요."

하였다.

이번에는 남편이 머뭇거렸다. 답답한 침묵이 한참 무겁게 그들을 짓눌렀다.

"그러지 말고 한번 쳐 보구려. 그렇게 부끄러워할 것 있소."

이윽고 남편은 달래듯 말하였다. 그러나 그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나…… 칠 줄 몰라."

모기만한 소리로 속삭인 아내의 두 뺨에는 붉은 기운이 흐르고, 눈에는 눈물이 살짝 어른거렸다.

"그것을 모른단 말이오."

남편은 득의양양하게 웃고는,

"내 한번 치지."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남편도 이 악기를 다룰 줄 몰랐다. 그저 건반 위를 이리저리 훑고 내리훑을 뿐이었다. 그제야 아내도 매우 안심한 듯 해죽 웃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참, 잘 치시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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